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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닥토닥 서재의 책과 일상
BOOK

달력

by 토닥토닥서재 2020. 10. 29.

점심에 컵스프와 식빵 두 조각을 먹었는데, 오후가 되자 출출해졌다.

문득 잘 익은 삼겹살 생각이 났다.

물기 묻은 상추를 툭툭 털어 그 위에 깻잎과 매콤새콤한 파무침을 한 젓가락 올리고

삼겹살 한접 그리고 쌈장에 마늘을 콕 찍어 올려~서~ 앙~

퇴근하면 헬스 하러 바로 가야지 했는데 발걸음은 집으로 자연스레 향했다.

'냉동실에 얼려 있는 목살을 녹이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주말에 굽다 남은 양념돼지고기를 먹어야겠다.'

늘어선 가로수 중에 유난히 노오란 은행나무를 얼른 사진에 담았다.

'음, 상추도 깻잎도 있으니 얼른 가서 먹어야지.'

채소가게도 곁눈질로 기웃거려 보고.

'배가 고픈 것도 있지만 고기 생각 나는 걸 보니 단백질이 필요한 거야. 먹어줘야 해 암.'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도 흘깃.

 

한달에 한두 번 고기가 당길 때가 있다.

불판에 앞뒤로 노릇하게 구운 고기 한 점을 후식 냉면이 아닌

처음부터 같이 주문한 비빔냉면에 얹어 돌돌 말아먹으면 캬==

그리고 된장국 한 숟가락을 촵~

.

.

.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내려다 순간 당황했다.

'어, 달력이 아직 9월이네.'

'왜 몰랐지?'

내가 바빴나?

월초에 야근을 일주일 내 했고, 그 뒤로..

그 뒤로는..(스트레스의 제곱쯤. 이게 달력을 못 교체할 사유야? --;;)

같이 사는 가족은 이게 그림이려니 한 거지.

날짜야 핸드폰을 보면 됐을 테고,

어느 누구도 달력을 유심히 안 본 거야.

나만 냉장고에 달력을 달마다 바꾸며 수채화 잘 그렸네 하며 좋아한 거였다.

서둘러 10월 달력으로 바꿔 끼웠다.

며칠 못 보겠네..이휴.

찬찬히 보니 그림 속에서 국화향기가 나는 것 같다.

햇살 좋은 가을날, 국화가 화단 가득 만발하던 어렸을 때 살던 집이 생각난다.

파란 대문은 꽃구경하러 오시는 동네분들로 열일을 했었고.

 

<국화꽃향기> 책도 생각나네. 두 번 읽었었지.

영화로 만든 것도 여러번 봤었다. 장진영, 박해일이 나왔었다.

책을 읽으면서 울고, 영화를 보면서는 펑펑 울었던 때도 생각난다.

아, 성시경의 <희재>도 생각나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더 울었는지
그대여 한순간조차 잊지말아요~거기 떠나간 그 곳에서 날 기억하며 기다려요~하던.

 

10월..

그래 국화가 피는 계절.

그림 속의 햇살도 화사하네.

그 집 화단의 국화꽃을 애지중지 키우셨던 할아버지, 할머니.

좋은 기억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아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 상추쌈해서 배불리 먹었는데

기분은 어째 허전하다.

점심시간에 잠깐 펼쳐 본 단테의 <신곡> 연옥 편에서

식탐으로 죽은 자들이 죄를 씻는 장면이 나오던데.

식탐 때문인가. 아냐.

순전히 내 정신머리 때문이야.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거야?

하루에도 몇 번씩 냉장고 열면서 이걸 못 봤어?

아 정말 속은 시끄럽고 기분은 더 다운되고 있는데

 

달력이 나를 보고 말한다.

 

"이제라도 나를 봐줘서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