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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닥토닥 서재의 책과 일상
BOOK

[사진 책]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

by 토닥토닥서재 2021. 12. 4.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다. 주말이라 5시에 문을 닫는데 집에서 4시 반에 나왔다. 우리 집은 도서관이 가까운 서(書)세권에 있다. 도서관은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있어 숲세권도 되고, 근처 자주 가는 카페와 편의점도 있어 슬세권도 된다. 여하튼 집 가까이 도서관이 있어서 좋다.

 

3년 전 정보처리기사 공부할 때도 그전에 직업상담자 자격증 딸 때도, 그전에 교원임용고시 공부할 때도 이 도서관에 다녔다. 이사 오기 전에도 도서관 근처에 살았는데 덕분에 한자와 비서, 컴퓨터 관련 자격증 땄고, 들을 만한 강좌를 수강했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이 나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못 보던 책이 보였다. 미술책들이 꽂혀 있는 칸이었다. 조금, 아주 조금 관심이 있어서 간혹 사진책을 들여다본다. 보통 이런 책은 사진과 글이 한쪽씩 번갈아 배치되어 있다. 작가의 짧은 단상과 사진에 번갈아 눈길을 두면서, 감성이 철철 넘치는 글에 파묻히는데,

그런데 이런, 작가의 글 센스 좀 보소. 흑백 톤의 잔잔한 사진 속에 유머가 있다. 곧 철거하는 동네의 골목길에서 짐작할 수 있는 감동뿐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웃음을 준다.

 

 

'상추밭 가는 길' 이란 제목의 글이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주머니 뒷모습 사진이 있다.

 

꽃무늬 원피스 아주머니는

상추밭에 모기를 기르신다.

 

나에게 상추가 실하다며 따라오라고 하시더니

키우는 모기들에게 내 피를 실컷 먹였다.

 

상추 한 봉지를 들고

다리를 긁고 있는 나를 보며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으셨다.

 

다음에는 긴 바지에 긴 소매를 입고 와야지.

상추만 뜯는 것이다.

모기에게는 뜯기지 말고

물론 아주머니는 조금 섭섭해하시겠지만...

 

***

 

작가는 상도동 달동네 밤골마을의 마지막 5년을 담았다. 2016년 철거 전까지 밤골 골목에서 만난 주민들 모습과 나눈 대화를 part 3 '괜한 참견, 뜻밖의 위로 편'에서 보여준다. 그중 한 사진이다.

 

 

 

사진을 보니 초등학교 다닐 때 연탄 갈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날이 추워지면 할머니는 연탄을 주문하셨고, 창고에는 내 키보다 높이 그득 연탄이 채워졌다. 연탄 갈 시간이 되면 집게를 두 손으로 잡고 연탄을 꺼냈다. 아래에 있던 다 탄 것은 버리고, 위에 있던 것을 아궁이에 다시 넣고, 새 연탄을 그 위에 올린 후 이리저리 돌려 불씨 구멍을 맞췄다.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의 한구절은 연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사진을 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그 시가 생각났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나는 이 구절이 연탄 시의 유일한 백미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좀 바뀌었다. 이런 감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생이별

 

떨어지기 싫은 거다.

하얗게 질리도록

푸석푸석 갈라지도록...

다 주었던 서로였으니까

 

딱 붙어 있는 연탄을 떼어내기 위해 식칼을 휘두르는 장면에서 '생이별'을 끄집어내다니. 내 머리로는 생각지도 못할 표현이다. 

 

 

 

 

니들이 홍시 맛을 알어?

 

이 다 빠지고

틀니 정도는 해야

이 맛을 아는 거야!

 

 

지금도 홍시를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이 난다. 삼복더위 속 할머니 제삿날에 좋아하셨던 말랑말랑한 복숭아를 놓아드리고 싶었다. 제사상에 복숭아를 놓으면 할머니가 제삿밥을 못 드시러 온다는 걸 안 뒤로 그 생각은 접었지만, 복숭아 먹을 때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두 분이 왜 홍시와 말랑말랑한 복숭아를 좋아하셨는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다.

 

 

 

 

책은 이렇게 펼쳐진다. 겉표지를 넘기고 90도 돌려서 왼쪽으로 넘겨 보게 돼있다. 책 보는 내내 작가의 얼굴이 저렇게 보인다. 사진 속의 할아버지가 '사진 많이 찍었소? 자 그럼, 그만 이리 와 앉어, 커피나 한잔 허구 가!'하고 말하면 작가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게 된다. 사진 속 어르신과 대화하는 작가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진다. 저렇게 사진을 찍었겠구나.

작가 최필조, 검색창을 열고 이름을 넣었다. 초등학교 교사, 아이들을 찍기 위해 시작한 사진이 '사진가'라는 또 다른 삶을 선사했다고 한다. 많은 블로거들이 구독하는 '최필조의 사진첩'을 운영 중이다.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느껴졌고, '보여줄 수 없어서 쓴 글'에서 작가의 마음을 보았다. 작가님의 심오한 뜻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마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보니 그것이면 됐다.  쫑.

 


까칠한 토닥이의 한마디: 굳이 저렇게 펼쳐지도록 만들어야 했을까. 무게에 못 이겨 제본이 손상 가는 것이 안타깝다.

다정한 토닥의 한마디: 세상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헛헛한 마음을 채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