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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닥토닥 서재의 책과 일상
BOOK

내가 본 오늘이 첫 눈

by 토닥토닥서재 2020. 12. 15.

아직 깜깜한 새벽, 잠결에 눈이 떠졌다.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니 6시.

어제 일기예보에서 눈이 많이 내릴 것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창문을 여니 훅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 그리고 눈에 들어온 폴~폴~ 날리는 눈송이들. 

'아-'

내가 본 첫눈이었다. 바깥 방충망까지 열고 손을 뻗어 보았다. 2020년 올해 첫눈은 12월 10일 새벽에 내렸다고 한다. 물론 못 봤다. 조금 내리다 그친 건지, 내가 너무 쿨쿨 잔 건지 몰라도 뉴스에서 검은 바탕에 흰 물체가 점점이 찍힌 사진 한 장 본 것이 전부다. 내가 직접 못 봤으니 첫눈은 무효야.

갤러리에 마땅한 사진이 없어서 아들한테 한장 구했다. 올 2월에 다녀온 스위스.

눈 내리는 것이 뭐가 좋으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렸을 때 한 겨울에도 친구들과 같이 놀던 그 즐거운 기억 때문일까. 광주 할머니 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나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파란 대문을 열고 나가면 포장이 안된 먼지 날리는 길을 지나 친구들과 앞산으로 채석장으로 뛰어다녔다. 좋아하는 만화 '바람돌이'에도 채석장 배경이 자주 나왔다. 바람돌이가 어디선가 나타나서 내가 소원을 말하면 '까삐까삐 룸룸~이루어져라~'하고 들어줄 것만 같은 상상을 하기도 했다. 놀다 보니 손등은 트다 못해 쩍쩍 갈라져서 피딱지가 생겼지만 고무줄놀이도 재밌었고, 풀 반찬 소꿉놀이도 재밌었고, 개울물에서 작은 물고기나 소금쟁이 보는 것도 재밌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면 어느새 어스름한 저녁이 되었고, '밥 먹어라~'하는 할머니 소리에 꼬질꼬질한 손으로 흘러나온 콧물을 쓰읍 훔치며 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나면 방 유리문에 각각 다른 육각형 눈 결정 모양이 여러 개 맺혀 있었다. 아마 그 정도면 웃풍도 있었을 테고 연탄보일러라 방바닥 난방도 골고루 안되었을 텐데 추웠던 기억은 없다. 마당에는 긴 작대기 하나에 걸쳐진 빨랫줄이 있었다. 언 빨래를 걷을 때마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안방 아랫목에서 녹이려고 반으로 접힌 부분을 펴면 쩍쩍 소리가 났다. 이러다 빨래가 부러지면 어쩌나 빨래가 얼마나 추웠을까 걱정도 했다. 처마 밑에도 고드름이 옅은 봄햇살까지 매달려 있었고, 눈도 자주 왔던 것 같은데 추웠던 기억이 없는 것이 신기하다. 내 뇌가 좋았던 순간만 남기고 나머지는 망각의 강으로 떠나보낸 건지, 아니면 할머니가 추울까 봐 잘 입혀주신 건지 아무튼 나의 겨울엔 추위가 별로 없다. 

 

눈이 펑펑 내렸다. 그 날은 눈이 제법 쌓여서 현관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그 불투명 현관 유리 너머로 하얀 마당이 느껴졌다. 마당에는 이미 신나서 뛰어다닌 해피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할아버지는 다 태운 연탄 한 장을 가져와 마당 맨 끝에서부터 데굴데굴 굴리셨다. 나는 그때 눈사람 만드는 것을 처음 본 것 같다. 눈사람 속에는 뜨겁게 자신의 몸을 태운 연탄 한 장이 들어있구나, 그래서 몸은 차디찬 얼음이지만 우리에게 따스함을 주었었나, 지금 드는 생각이다.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눈사람은 마당에서 그렇게 한동안 서있었다.

 

눈이 내리면 우리 집 개 해피만큼 신이 났다. 먼 산에도 앞 산에도 길에도 소복이 쌓이는 모습이 예뻤다. 눈길을 걸으면서 노래를 불렀다.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 누가 누가 새벽길 걸어갔나~외로운 산길에 구두 바알자아국~' 발자국이 나를 따라오는 것이 재밌었다. 다 커서도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걸을 때면 이 노래가 절로 나오고 발자국을 일부러 꾹꾹 찍어보게 된다.

 

여기까지는 눈에 대한 좋은 감회이다. 물론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운전하는 사람에게 눈은 참 어려운 스킬을 요구한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받아 좌회전하다가 차가 빙그르 회전반경을 넘어 더 돌았을 때, 가만히 서있는데 눈길에 저절로 미끄러지며 제동이 안되었을 때, 고속도로에서 눈이 펑펑 내려 거북이보다 더 천천히 가야 했을 때 등 난감했던 적이 있어서 웬만하면 눈길에는 운전을 안 하는 편이다. 또 군대를 가면 눈이 얼마나 나쁜 존재가 되는 지도 수없이 들었다.

 

눈 내리는 걸 확인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휴일 아침이라 2시간 정도 더 자고 일어나서 다시 밖을 내다봤다. 학교 운동장에는 눈가루가 포스스 뿌려져 있었고, 차 지붕도 눈을 얹고 있었다. 그리고 놀이터, 이른 시간인데 꼬맹이 서너 명이 보였다. 핑크색 코트와 모자, 마스크로 무장한 여자아이 둘과 부츠까지 챙겨 신은 남자아이들은 아침 일찍 놀이터에 나와서 눈을 만지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부모들, 분명 아이들에게 눈을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눈을 만지고 가까이에서 느끼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생각이 났다. 장갑과 모자, 목도리까지 돌돌 말아서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서 뛰놀게 했다. 그때의 사진을 보면 아이들이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지금 봐도 흐뭇하다. 난방이 잘 안 되는 오래된 아파트라 놀고 들어온 아이들은 난로 앞에서 빨개진 볼을 녹였다. 그 사진 속의 작은 거실, 난로 앞에서 언 손을 녹이며 웃는 딸아이의 모습이 선하다.

 

놀이터의 눈은 하루도 못 가고 사라졌다. 짙은 회색으로 낮게 깔린 하늘도 서서히 제 빛을 찾아갔다. 즐거움을 주고 금세 사라진 눈, 내가 본 오늘이 첫눈이다. 실외기 위에 쌓인 눈 한웅큼을 쥐어 딸아이의 잠든 손에 살포시 놓아주었다. '으응? 눈이네.' 일어나서 밖에 한번 보라고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워줬다. '와~' 한번 보고 다시 눕는 딸.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에게 즐거운 추억을 주셨듯 나도 좋은 기억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다. 또 나에게도 좋은 기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 눈처럼, 하얗고 빛나는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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