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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닥토닥 서재의 책과 일상
BOOK

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

by 토닥토닥서재 2020. 5. 6.

임선경 지음

(주)알에이치코리아

1판 1쇄 2020.1.15.

 

 

 

 

 

 

 

 

 

 

임선경 작가님은 TV 드라마 '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 '이것이 인생이다'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극본을 썼고, '빽넘버'와 '나는 마음 놓고 죽었다' 소설을 썼으며, 시나리오와 동화, 에세이를 쓰는 분입니다. 재미가 있어야 의미도 있다는 소신으로 글을 쓴다는 말에 밑줄을 그어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나이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남편, 애들과 한 팀으로 묶여 내 정신이 아닌 채로 살아왔지만, 이제라도 정신을 좀 차리고 잘 살아 볼까 하니 나이 오십이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아이들이 다리에 감기던 시기가 지나고 나니, 내 다리로 어디든 갈 수가 있긴 한데 대체 어디를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때가 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가장 열심히, 꾸준히 한 일이 바로 나이 먹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나이 먹는 일'에 대해 가만 들여다보고 곰곰 생각해본다. 어른이 되는 일, 사는 일에 허기가 져서 처음에는 맛도 모르고 허겁지겁 집어먹기 바쁘다가 이만큼 먹으니 이제 좀 느긋해져서일까? 내가 먹고 있는 것이 대체 뭔지 요모조모 뜯어보고 어떻게 먹어야 체하지 않고 잘 먹을 수 있을까도 생각한다.

<프롤로그 중에서>

 

 

 

종일 껌딱지인 아이들때문에 화장실도 문 열고 일 보던 시절이 있었지요.

길을 걸을 때도 내 손을 절대 놓지 않았던.

지금은 다 컸다고 길에서 손잡는 일은 절대불사이고

아쉬울 때만 살을 붙이는 아들.. 어쩌겠어요 이젠 받아들여야..

 

 

 

 

뭘 받아들여야 하지? 이별을, 어떤 시대의 종언을.

우리 사이는 이제 끝났다. 애정으로 충만한 사이. 서로의 가장 큰 관심사가 서로였던 사이. 좋은 일이 생기면 엄마에게 자랑하려고 뛰어오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는 엄마를 찾으며 울고, 뭔가 열심히 하는 것은 엄마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고, 엄마가 해 준 음식이 제일 맛있고, 엄마가 있어야 안정이 되던 그런 아들은 이제 없다. 내가 어떤 한 사람에게 엄청난 존재였던 그 시절은 이제 끝났다.

나는 아이의 인생에서 구석자리로 밀렸다. 없으면 안 되지만(없으면 불편하니까) 있어도 크게 존재감을 어필하지는 말아야 하는 존재. 그냥 기능으로서만 존재하는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부엌 구석에 자리 잡은 냉장고나 틀면 나오는 온수. 뭐 그 정도가 아닐까? 아이는 하루에도 수십 번 냉장고를 이용하지만, 냉장고가 갑자기 관심을 요구하거나 좋아해 달라고 주장하면 어이없을 것이다.

나는 상실감과 분노와 무기력감과 슬픔을 느꼈다. 왜냐고? 애인이랑 헤어졌으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p82-83 <나는 옛사랑과 한집에 산다> 중

 

 

 

 

p20 <긴장을 잃으면서 얻은 것은 평화> 중

 

 

번거롭고 귀찮고 은근 신경 쓸게 많은 건강검진도 나라가 챙겨주니 잘 받고,

간혹 학부모 공개수업 등으로 아이의 학교에 갔을 때

친구들이 '너네 엄마 예쁘다'라는 말에 아이 기분이 좋아지도록

관리를 해봅니다.

하는 데까지 엄마 역할을 충실히.

 

 

 

 

 

이 두 그림을 보니 문득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엄마는 무슨 말이 잘 생각이 안 나면 "저 그 뭐 그거 있잖아. 그거"

그게 뭔데?  "그거"  그니까 그게 뭐냐고

그러다 엄마는 파하하하 웃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언젠가 저도 엄마처럼 되겠지요.

엄마, 우리 곁에 오래 계세요.

 

 

 

 

아빠는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아빠였으므로 나는 아빠가 아닌 내 아빠를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빠도 어린 소년이던 적이 있겠지. 앳된 청년이던 적도 있겠지. 아빠는 계엄 치하에서 군인에게 허락을 받고 시를 낭송하던 순한 대학생이었다. 늙어서는 길가의 빨간 꽃을 캐어와 못 쓰게 된 주전자 안에 심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시골집 뒷산에 묻혀 있다.

 

나는 쉰한 살에 고아가 되었다. 고아가 되고 보니 사는 일이 그 전과는 또 다르게 느껴진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라는 실감이 조금은 더 생겼다고 할까. 어떻게 살았든 생의 끝은 단독자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체감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아빠마저 돌아가셨다. 이제 내게는 친정이라고 불릴 만한 곳이 남아있지 않다. 시골집은 비었고 나는 연휴에 갈 곳이 없어졌다. 연휴에 친정에 내려가는 일은 일종의 '의무'처럼 느껴져서 솔직히 귀찮기도 했다. 그래도 너무 오래 안 내려갔다 싶으면ㅡ거기는 와이파이가 안 돼서ㅡ싫다는 아이들을 구슬리고 협박해서 데리고 갔다. 하지만 이제 갈 곳이 없다. 고향이 없어졌다. '마음의 고향' 그런 것 말고 진짜 고향 말이다. 도로 정체를 피해 새벽길을 달려서 갔던 곳, 그 고장, 친밀하게 느껴지는 행정 구역, 그곳이 통째로 사라진 느낌이다.

 

p90-93 <오십 대 고아의 진짜 외로움> 중

 

 

 

 

 

 

 

"그려, 언젠가는 되겠지."

'언젠가'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언젠가에 대한 기대가 있는 삶과 없는 삶은 다를 것이다. 중요한 건 믿음이다. 훗날을 믿지 못하면 훗날을 상상할 수도 없다.

p138-139

 

 

미래를 걱정하고 준비하는 것은 인간뿐이라고 합니다.

배가 불러도 먹는 것도 인간뿐이고.(ㅎㅎ갑자기)

저는 아이에게 엄마는 이번에 이걸 해볼 거고, 이렇게 저렇게 시도를 하고 있고

언제쯤이면 이렇게 될 거야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내가 잘하고 있나 봐주렴.

아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래를 만들고,

저는 이렇게 제 미래를 만들어 봅니다.

그 '언젠가'를 위해서요.

 

 

 

 

 

 

나는 높은 목표를 향해 자신을 채찍질하며 한 계단씩 올라가는 훌륭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지지와 격려와 갈채가 필요하다. 주변에서 별로 그런 걸 해주지 않으면 나 혼자라도 야단법석을 떨며 박수를 쳐줘야 한다.

그림을 배운다고, 영어 공부도 한다고, 지금 어떤 책을 쓰고 있다고, 조용히 남모르게 해도 될 일을 천지 사방에 대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내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갈채다.

 

"바쁘게 재미있게 살고 있네? 잘하고 있어."

 

그러면 내 갈채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내가 나에게 친 박수가 무안해지지 않도록 계속 바쁘게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p250<그래서 뻔뻔해져야 한다> 중

 

 

 

제가 여기에 매일 올리는 '그냥체크'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매일 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동력이랄까요.

작심만 하고 금새 나태해지는 저를 잡아줄 '그냥체크'에는

영어 공부했다고 스쿼트 했다고 그 한 줄 쓰기 위해 

꼭 해라라는 나와 또다른 나와의 타협입니다.

 

 

 

 

 

그의 말처럼 마지막에 가져갈 것은 기억뿐이다. 사랑으로 기억되는 추억, 감동했던, 가슴을 울렸던, 강렬하게 느꼈던 어떤 순간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남는다. 간직할 순간이 많은 인생, 남아있는 기억이 많은 인생이 부유한 인생이다.

특별하게 살아야, 남다르게 살아야 기억이 많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생겨난 기억을 흘려보내지 않고 잘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기억은 수집하는 것이다.

 

 

 

그림 같은 기억을 붙잡았다 하더라도 그게 언제까지고 남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휘발성이 강하다. 기억을 수집하여 오래 간직하는 방법으로는 글쓰기만 한 것이 없다. 글을 쓰는 동안에 세세한 기억을 불러오게 된다. 그 순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기도 한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볼 수도 있다. 언제까지고 잃어버리지 않을 나의 수집품을 가질 수 있다. 

 

행복이라는 것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소소하게 자꾸만 여러 번 행복해야 대체로 행복하다. 자꾸 여러 번 행복하려면 행복한 어떤 한순간을 자꾸 소환해내야 한다. 작은 경험을 자꾸만 복기하고 그 경험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좋은 감정을 여러 번 다시 느끼면 그것이 끝까지 잃지 않는 행복이 된다고 생각한다.

 

p255-258 <마지막에 가져갈 것은 기억뿐> 중

 

 

 

지금 사는 세상은

젊으나 늙으나 처음 살아보는 세상이라는 작가님의 말처럼,

이 100세 시인의 시처럼,

한 번 지나가는 인생,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감사하며

살.아.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