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토닥토닥 서재의 책과 일상
BOOK

티셔츠에 이토록 애정이 많다니! 무라카미 T

by 토닥토닥서재 2021. 8. 18.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좋아한다. 출간된 것을 전부 다 읽지는 못했지만, 절반 이상은 읽은 것 같다. 좋아하는 이유를 대라면 그만의 독특한 문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책에서도 그것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자신이 소장하는 티셔츠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200여 장의 소장 티셔츠 중 이 책에는 108장이 소개되었다. 잘 입는 것도 있고, 그냥 모셔두고 있다는 것도 있단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매체를 통해 본 작가는 대부분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었다. 정기적으로 달리기를 해서 이런 옷차림을 좋아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놀라웠던 건 이 티셔츠 한장한장에 대한 그의 기억력이었다. 어디서 얼마를 주고 샀는지, 그때 만난 사람과 주변 풍경은 어땠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로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티셔츠에 생명력을 주고 있었다. 중간까지 읽다가 내 옷장문을 열어 보았다. 나에게도 티셔츠가 몇 장 있다. 그냥 필요해서 입는 것이지 그렇게 애착이 가는 건 없었다. 나는 이토록 무심한데 작가의 남다른 안목은 이렇게 책까지 발전하게 했구나 생각했다.

딱히 물건을 모으는 데 흥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새 이런저런 물건이 '모이는' 것이 내 인생의 모티프 같다. 다 듣지 못할 양의 LP 레코드, 연필깎이에 끼우지도 못할 만큼 짧아진 연필, 별의별 것이 내 주위에 빼곡하게 늘어간다.(...) 이런 걸 모아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종의 정에 이끌려 물건을 자꾸 쟁이게 된다. 몽당연필을 몇백 개 모아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데 p5-6

 

다 듣지 못할 양의 LP레코드라니, 음악을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컬렉션이 궁금했다. 단 한번만이라도 구경 했으면. 내가 유치원을 다녔을 때 할머니 집에는 LP를 들을 수 있는 턴테이블이 있었다. 레코드판을 놓고 바늘을 살포시 올려 음악을 들었다. 할아버지가 LP판 닦는 법도 알려주셨다. 지금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 핸드폰, 노트북, 태블릿, 컴퓨터, MP3 등등 많지만 그 시절에는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맞추던 라디오와 이것뿐이지 않았을까. LP 레코드를 모으고 즐겨 듣는 작가의 취미가 멋있다.

티셔츠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모인 것'이다. 값싸고 재미있는 티셔츠가 눈에 띄면 이내 사게 된다. 여기저기에서 홍보용 티셔츠도 받고,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완주 기념 티셔츠를 준다. 여행 가면 갈아입을 옷으로 그 지역 티셔츠를 사고......이러다 보니 어느새 잔뜩 늘어나서 서랍에 못다 넣고 상자에 담아서 쌓아 놓는다. 절대로 어느 날 "좋아, 이제부터 티셔츠 수집을 하자"하고 작심한 뒤 모은 게 아니다. p6

 

아이쿠 상자에까지 담아놓다니, 그렇게 모인 티셔츠가 책을 내는 데 쓸모가 있었다니 다행이다. 그대로 묵혀 두었으면 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티셔츠를 몰랐을 테니까.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생각도 재밌었다.

딱히 비싼 티셔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술성이 어쩌고 할 것도 없다. 그냥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낡은 티셔츠를 펼쳐놓은 뒤 사진을 찍고 거기에 관해 짧은 글을 쓴 것뿐이어서, 이런 책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우리가 직면한 작금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조가 될 것 같지도 않고).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전반에 걸쳐 살다 간 소설가 한 명이 일상에서 이런 간편한 옷을 입고 속 편하게 생활했구나 하는 것을 알리는, 후세를 위한 풍속 자료로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뭐,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p8

 

어느 쪽이든 이 사소한 컬렉션을 그런대로 즐기라 해서 나도 그렇게 했다. 읽는 중에 간간히 내 티셔츠를 떠올리기도 했다. 선물 받은 것, 여행지에서 산 의미 있는 것들, 색만 다르고 모양은 죄다 같은 홈쇼핑에서 산 티셔츠도 생각났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좋아하는 티셔츠는 이것이다. 마우이 섬 시골 마을의 자선매장에서 1달러를 주고 샀는데 '토니 타키나니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하다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까지 썼다고 한다. 이 소설이 영화화까지 되어서 작가의 인생에서 한 투자 가운데 단연코 최고였다고!

 

마우이 섬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하와이 쪽에 있는 하와이 다음으로 가장 큰 섬이었다. 미국의 10대 아름다운 섬이고, 세계적인 휴양지라는 이곳은 백인 다음으로 일본인이 23% 살고 있다고 한다. 토니 타키나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일본인이 왜 많이 살고 있나하는 궁금증이 마우이 섬을 검색하다 보니 자연스레 든다.

 

 

"티셔츠가 이 정도 있으면 여름이 와도 뭘 입을지 걱정할 일도 없고 말이죠. 매일 갈아입어도 여름 한 철 내내 다른 걸 입을 수 있지 않을까요. 작가란 참 편해서 좋군요."라고 말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글한 표정이 그려진다. 

 

더위를 가시게 해 줄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별다방에서 읽으면 깔맞춤이겠네, 수박도 생각나고, 표지를 보며 별 생각을 해본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시원함을 느끼고 싶은 분이라면, 무엇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티셔츠 컬렉션이 궁금한 분이라면 읽어보시면 좋겠다. 쫑.